[돈과 시간 1] 월세는 무엇을 사는가
밀턴 ·
1. 임대료는 무엇을 사는가
세입자가 매달 보내는 돈은 방을 사는 돈이 아니다. 방은 이미 거기 있고, 돈을 낸다고 방이 새로 생기지는 않는다.
그 돈이 실제로 사는 것은 따로 있다.
한 달 지출을 뜯어보면 보인다. 보일러가 멈추면 기사를 부르고, 복도 등이 나가면 사람을 쓰거나 직접 시간을 들인다. 청소, 분리수거, 누수 확인, 밤 열한 시에 오는 연락. 세금과 이자를 빼고 나면 남는 항목은 거의 전부 누군가의 시간이다.
돈은 물건을 움직이지 못한다. 자동차를 굴리는 것은 기름이고 화면을 켜는 것은 전기다. 돈이 하는 일은 하나뿐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
스마트폰 값을 나눠봐도 같은 성질이 나온다. 부품값, 조립비, 디자인과 소프트웨어, 광고비.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하나다. 전부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이다. 돈이 사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사람들의 협력이다.
임대업도 다르지 않다. 세입자가 사는 것은 몇 평이라는 면적이 아니다. 그 방이 살 수 있는 상태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산다. 물이 나오고, 문이 잠기고, 고장 나면 누군가 온다는 것. 그 상태를 만드는 것은 벽돌이 아니라 사람의 시간이다.
그래서 임대업은 공간을 빌려주는 사업보다 시간을 사고파는 사업에 가깝다. 세입자는 돈으로 임대인과 수리기사와 청소인력의 시간을 사고, 임대인은 그 돈으로 다시 다른 사람의 시간을 산다.
실무가 갈리는 지점이 여기다. 방을 물건으로 보면 판단이 비용을 줄이는 쪽으로 기울고, 시간으로 보면 응답을 빠르게 하는 쪽으로 기운다. 같은 돈을 써도 어디에 쓰는지가 달라진다.
2. 계약은 찍어누를 수 없다
그런데 돈이 사람을 움직인다고 해서 아무나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하나 붙는다. 상대의 동의다.
만 원짜리가 가치를 갖는 이유는 편의점 주인이 그것을 받고 물건을 내주기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그 종이를 받으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상대가 거래를 거부하면 아무리 큰 돈도 그 자리에서는 쓸모가 없다.
임대차 계약이 이 성질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는다. 누군가 그 방에 살기로 동의해야 수입이 생긴다. 공실은 건물이 고장 난 상태가 아니라 합의가 아직 성립하지 않은 상태다.
비교 대상을 놓고 보면 구조가 분명해진다. 봉건제의 영주는 농노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땅에 묶인 사람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옆 동네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에서 권력은 상대를 찍어 누름으로써 성립한다.
자본주의는 거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반드시 상대의 동의가 필요하고, 그래서 구조적으로 상대를 인격체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수단으로 만든다는 비판이 자주 나오지만, 실제로는 내 동의를 구해야만 작동하는 체제다.
임대인의 힘도 같은 자리에 있다.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합의를 얻어내는 능력이다. 조건을 통보하는 쪽과 조건을 제시하고 합의를 만드는 쪽은 길게 보면 성적이 다르게 나온다. 갱신이 그렇고 분쟁이 그렇다. 법으로 갈 수 있는 사안이라도, 합의로 끝난 건과 끝까지 간 건은 들어간 시간과 비용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3. 가만히 있는 돈은 줄어든다
합의가 있어야 수입이 생긴다면, 합의를 만들지 않고 가만히 있는 쪽은 어떻게 되는가. 건물만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월세가 들어온다는 말이 있지만 숫자로 따지면 정반대다.
1억을 금고에 넣어두는 경우를 보자. 물가가 연 3%씩 오르면 10년 뒤 그 1억의 실질 구매력은 7,400만 원 수준이 된다. 20년이면 5,500만 원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절반 가까이 사라진다.
여기에 상대적 손실이 더해진다. 내가 가만히 있는 동안 다른 자본은 움직인다. 누군가는 주식에서, 누군가는 사업에서, 누군가는 같은 동네의 다른 건물에서 수익을 만든다. 10년 뒤 내 1억이 7,400만 원이 되는 동안 다른 자본은 2억이 된다. 절대 금액도 줄었고 상대적 위치는 더 크게 밀린다.
임대업에서 이 손실은 조용히 들어온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임대료, 통장에 그대로 앉아 있는 보증금, 지금 빼면 손해라며 넘긴 공실 두 달, 미루다가 커져서 한꺼번에 나간 공사비. 어느 것도 사고로 기록되지 않는다. 장부에는 작년과 비슷함으로 남는다.
옆 건물이 내부를 고치고 조건을 손보는 동안 내 건물이 그대로라면, 아무것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방을 보러 오는 사람의 눈에는 이미 순위가 바뀌어 있다. 임대료를 내리지 않아도 밀리고, 공실 기간이 조용히 길어진다.
일은 아래에서 하고 소유한 쪽은 위에서 받기만 한다는 그림이 흔하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에서 가만히 있는 자본은 앉아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앉아 있으면 사라진다. 가진 쪽까지 경쟁하게 만드는 체제라는 뜻이다. 임대인도 예외가 아니다. 건물은 가만히 서 있지만 그 건물의 값어치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번 달 지출 내역을 펼쳐놓고 보면 그 돈은 무엇을 사고 있었는가. 그리고 올해 건물에서 바꾼 것을 세 가지 댈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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